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문단 편집) === 나라를 잃고 남하하다 === 떠이선 삼형제가 구 [[응우옌씨 정권]]을 무너뜨린 후 일부 병력만 쟈딘에 남겨두고 꾸이년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에 응우옌푹아인은 멸망한 완주의 유신들을 이끌고 옛 본토로 돌아와 쟈딘에 주둔하던 서산군을 공격했다. 도타인년(Đỗ Thanh Nhơn, 杜淸仁, 두청인), 레반꾸안(Lê Văn Quân, 黎文勻, 여문균), 완문홍, 송복광, 송복량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그를 도와 완씨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만들었고, 또한 서산군에 대항한다는 뜻으로 '''동산(東山)'''군을 조직하는 주체가 되었다. 유능한 장수들의 도움으로 쟈딘을 수복한 응우옌푹아인은 이곳에 고토를 강점한 서산에게 항전할 것을 선포하고 '''대원수섭국정(大元帥攝國政)'''이 되었으며 이때 그의 나이 17세에 불과했다. 한편 [[떠이선 왕조|서산]]의 우두머리인 [[타이득|응우옌반냑]]은 도타인년이 이끄는 동산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응우옌푹아인은 레반꾸안을 보내 자신도 서산에게 반격했고 [[https://zh.wikipedia.org/wiki/%E5%B9%B3%E9%A0%86%E7%9C%81|평순]], 연경 일대까지 추가로 수복했다. 응우옌푹아인은 서산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전에 멸망한 완주의 인프라를 재건하고 군대들을 양성했는데, 그를 도와준 피뇨의 도움으로 서방의 신식 무기인 수류탄을 포함해 근대화된 군대를 조직했다. 또한 포르투갈로부터 세 척의 서양식 군함을 구입해 프랑스인 마뉴엘(Manuel)을 선장으로 영입했다. 이리하여 응우옌씨 세력이 강해지자 완주는 쟈딘성의 6진을 다시 수복했으며 서산군도 그들을 정벌하려 했으나 매번 실패했고, 이런 성장에 힘입어 완주는 캄보디아의 내전에 개입해 친베트남 성향인 안영(安英)을 왕으로 책봉시키고 부하들을 파견해 캄보디아를 괴뢰화시켰다. 응우옌푹아인은 1780년 대원수섭국정이라는 애매한 직함에서 칭왕식을 올리고 구 응우옌 주의 군주와 동일한 왕(王)에 등극했다. 통칭 완왕(Nguyễn Vương, 阮王)이라 하며, 제후왕이 된 응우옌푹아인은 그에 걸맞게 [[후 레 왕조]] 당시 황제인 [[현종(레 27대)|현종(顯宗)]]의 경흥(景興) 연호를 채용해 완주의 정식 부활을 선언했으나 이듬해 공신 도타인년의 세력을 염려해 똥푹띠엔(Tống Phúc Thiêm, 宋福添, 송복첨)에게 도타인년을 죽이라 명한 게 빌미가 되어 도타인년 휘하의 동산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 서산군의 [[꽝쭝|응우옌반후에]]가 완주를 공격했고 두 세력은 칠기강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완왕은 [[시암]]의 지원군의 도움까지 받았으나 [[메콩강]]에서 패배하고 근거지를 모조리 잃은 뒤 시암으로 망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